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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극세종과학기지

눈나라 얼음나라(웹진)

세상의 끝에서 미래를 열어갑니다.

[23차 월동대] 2010년 제32호 2010.08.09~08.15 [세종로탐방] 나쁜 블리자드

  • 조회수 : 2000
  • 작성자 : 관리자
  • 작성일 : 2010.11.17

 글 : 최정규(기계설비)


유지반에서 당직 근무하던 날, 밤새 블리자드가 심하게 불었다.

순찰을 돌아야 할 시간이지만 블리자드가 너무 심해 고글을 착용하고도 앞이 보이지 않는다. 문 앞의 눈이라도 치우려고 밖으로 나가 보았지만 얼굴의 노출된 부위는 금방이라도 얼어 버릴 것 같았다. 기계동 앞문과 뒷문은 자꾸만 눈으로 쌓여가고, 결국 사용할 수 있는 문은 2층 계단 문뿐이었다. 외부에 있는 순찰 코스는 결국 돌아볼 수가 없었다.

밤이 깊어질수록 블라자드는 더 심해져 기상 현황판에 30m/s이상으로 기록되는 강한 바람과 함께 밀가루같은 고운 눈이 날려 건물에 조그마한 틈이라도 있으면 눈이 쌓였다. 아니 그 틈을 비집고 들어온다는 표현이 더 적당하겠다. 이런 날은 저녁에 운동을 하려고 오는 대원도 없고, 건물은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 흔들리고, 밖은 한 치 앞을 분간할 수 없는 암흑세계, 게다가 근무 중 혼자 있다 보면 바람소리가 이상하게 우우우 하는 유령이나 귀신 소리로도 들린다.

새벽 3시, 두 번째 순찰 시간이 되었지만 그냥 전자렌지에 라면하나 돌려 먹고는 직접 순찰은 기계동과 전기실, 발전실, 조디악 창고로 한정하였다. 정비동 순찰은 CCTV로 대신하기로 하였다. 기계동을 순찰하고 전기실을 순찰하던 중 전기실 내부 전등이 몇 개 정전된 것을 확인하고 발전실로 가 보았다. 아니나 다를까 발전기용 라디에이터 상부의 작은 틈을 타고 눈이 들어와 전등이 누전 된 것이었다. 발전실과 조디악 창고의 작은 틈으로도 눈이 조금씩 계속해서 들어와 쌓이고 있었다.

조금은 걱정이 되었지만 아주 긴급한 상황은 아니라고 판단하였는데, 아침 6시 마지막 순찰 때 확인하니 발전실 상부에 있는 전등이 모두 정전되어 있었다. 누전차단기를 확인하여 스위치를 올려보니 약간의 습기 때문인지 차단기는 작동하지 않았다. 급히 전기설비 한대관 대원에게 연락하여 전기실과 발전실 전등 모두가 누전으로 정전된 상황을 알리고 지원을 요청했다. 덧붙여 1층 문은 눈으로 덮여 있으니 2층 계단 문을 이용하라고 알려 주었다.

잠시 후 한대관 대원이 기계동에 도착했다. 전기실 상부 전등부터 보수하기로 하고 사다리를 가져다 오르기 시작했다. 바로 그 순간, 사다리의 중간 고리가 잘 맞물리지 않았던 모양이었다. 미처 손 쓸 겨를도 없이 미끄러운 바닥에 사다리가 미끄러지듯 펼쳐지면서 한대관 대원이 사다리와 함께 바닥으로‘쿵’하고 떨어졌다.

‘아뿔사’싶었지만 이미 때는 늦었다. 바닥에 쓰러져 있는 한대관 대원은 숨을 쉴 수 없을 정도로 큰 충격을 받은 모양이었다.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그저 거친 신음 소리만 냈다. 이른 아침이라 다른 대원을 부를 수도 없고, 지금 이 상태로는 의무실이 있는 생활동으로 옮기기도 쉽지 않은 상황이었다.‘어쩌면 좋나’하고 있는데, 끙끙 앓던 한대관 대원이 정신이 드는지 몸을 추스르고는 발전설비 류성환 대원이 지금 식당에 내려와 강경갑 주방장의 아침 식사 준비를 도와주고 있으니 부르라고 했다.

류성환 대원에게 전기실로 빨리 와줄 것을 요청하고 다시 한대관 대원을 살펴보니 조금씩은 거동이 가능했고, 일어서는 것도 문제가 없었다. 하지만 나는 어떠냐고 물어 보기도 무서웠다. 오른쪽 다리와 오른쪽 팔 부위에 충격을 받았는지 심한 고통을 호소했고, 넘어지면서 긁힌 손가락과 팔에서는 피가 많이 흘렀다.

빨리 의료담당 이어진 대원을 불러야겠다고 말하니 지금은 잘 시간이니 조금 있다가 치료 받으면 된다고 하면서, 류성환 대원이 도착하자마자 다시 사다리를 놓고 사다리 위를 올라가는 것이 아닌가. 우리는 안 된다고 말렸지만 결국 전등위로 올라가 펜치까지 움켜쥐는 한대관 대원. 하지만 펜치를 잡는 순간 통증을 느껴 결국에는 류성환 대원이 처리하도록 넘겨주고 사다리를 내려왔다.

이 못말리는 한 씨 고집은 전기실과 발전실 전등을 살릴 때까지 전기실에서 쉬고 있으라는 나와 류성환 대원의 말을 듣지 않고 발전실까지 아픈 몸을 이끌고 누전차단기 교체를 지시하고 마지막 조치가 다 완료 될 때까지 옆을 지키고 서 있었다. 작업이 완료되고 나니 그제서야 통증을 느끼는지 이곳저곳 아픈 곳이 많다고 했다.

우리는 블리자드를 헤치고 생활동으로 이동하여 의무실로 가서, 이어진 대원을 찾아 진료를 받았다. 이곳저곳을 진찰한 이어진 대원이 다행히 다리와 팔, 손의 뼈에는 이상이 없는 것 같다고 했다. 그 한 마디 말에 난 가슴을 쓸어 내렸다. 하지만 손가락을 보니 살이 떨어져 나갈 정도로 많이 벗겨져 있었고 소독을 하자 아픔을 호소했다. 옆에서 지켜보는 내가 아픈 듯 인상이 찡그려졌고, 소식을 들은 대장님과 많은 대원들이 의무실로 달려와 상태를 확인하고 염려해 주었다.

이어진 대원은 그리고 최소 1주 정도는 팔을 움직이지 못하게 고정을 해야 한다며 마지막으로 팔 고정 작업을 했다. 치료가 끝나가자 잊고 있었던 사고 상황이 떠올랐다. 블리자드가 원망스러웠고, 한대관 대원에게 미안할 뿐이었다.

앞으로 기지에서 가장 사다리를 많이 사용하고 오르내려야 하는 한대관 대원에게 사다리 사용 전 이상 유무를 꼭 확인하고 작업을 하도록 내가 조금 더 신경 써야겠다. 좋아하는 근력운동을 못해 귀로출장까지 몸짱 되기는 글렀다며 투덜투덜대는 한대관 대원. 지금도 팔에 불편을 호소하며 가끔은 아프다고 하는데 하루 빨리 건강하길 바라며, 우리 23차 월동대원 남은 기간 모두 건강하게 월동을 마치길 간절히 기도해 본다.